창문넘어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20살 초반 그 언제쯤 2~3년을 남자친구조차 모르게 몰래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 가브리엘의 집에 맡겨진 할머니 한분은 늘 빨간 저고리 띠 하나를 손에 쥐고 사셨다. 다른 분들은 모두 그 할머니를 “빨간끈 할매“라 불렀다.
약간의 치매가 오셨지만 당신께서 가진 삶의 의지가 참으로 강하셨는지 더 이상 중증 치매로 발전하진 않으셨고 다만 날씨가 좋고 햇볕이 고운 어느날  늘 계시던 자리에 없어 찾아보면 뒷뜰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예의 그 빨간 저고리 띠를 손에 꼬옥 쥐고는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곤 하셨다.
그런 행동을 보이실때면 그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할머니를 건들지 않았다.
멋모르는 자원봉사자가 괜히 말을 시켰다가 엄청난 화만 내시게 하고 무안스럽게 돌아간 적이 있을만큼 할머니에게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깊은 명상의 시간인걸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지긋이 언지를 듣고 날씨 좋은 날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던 어느 또 다른 햇빛 고운 날이던가 할머니께서 갑자기 빨간 끈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늘로 날려보내셨다.
끈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만지고 만져져서 닳고 가볍다 보니 그 맑은 하늘에 누가 손으로 집어가듯 훅 날려나갔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괴성이 나왔다.
그 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괴성을 질렀다.
“할매!! 안돼요!!”
할매는 정말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평생 그 표정을 잊지못한다.
괴성을 지르며 그 끈을 잡으러 아둥바둥 하던 내게 다가와 조용히 하지만 강하게 어깨를 부여잡고 도리질을 하셨다.
냅둬라. 
애썻다.
고맙다.
너는 너 할일 해라.
그 네 마디를 어쩌면 그리도 담대하고 따뜻하게 하시던지 나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 품에 안겨 오분인가를 펑펑 눈물 한바가지를 쏟아냈다.
할매는 그 양지바른 자리에 나를 데리고 가 앉히고는 자근자근 자기 기억을 되새김질해 내게 먹여주었다.
할매는 1920년 서울 어디 변두리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다가 18살 되던 해에 당시 일본인에게 위안부로 끌려가던 자기를 구해준 가시버시(남편)를 만났다 했다. 위안부가 되기 싫어서라도 자기는 살기 위해 그 사람과 결혼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봤을때 저리 무뚝할까 내가 그렇게 싫은가 싶을 정도로 표정이 차가웠고 자기하고 4살 차이가 나는 그 사람이 너무 무서워 오돌오돌 떨던 할매의 어깨를 양손으로 “씨게” 잡고는 가시버시가 예의 그 무뚝한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안잡아먹는다. 
나도 니가 어색타.
그러니 친구다.
처음은.
친구다.
할매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워 겨우 눈물 흘리며 긴장이 풀렸고 그 뒤로 한동안 가시버시와 아무 일도없다가 그렇게 정이 통해 처음 잠자리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러다 6.25가 터졌고 그 지옥같은 곳에서 할매는 가시버시를 혼자 놔두고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혼자 남은 노모를 남겨둘수 없으니 일단 아이들과 먼저 가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제발 살아만 있어라 끌려가지 마라 속으로 빌고 또 빌며 아이들과 짐을 챙기던 저녁밤 가시버시가 손에 한복 저고리를 하나 쥐어주더랬다.
집에 돈 될만한게 이 비단저고리 하나인데 팔지는 말라.
가락지 하나 못해준 나이니 이걸 정표 삼아달라.
상아색 비단에 빠알간 저고리…
그 저고리 색이 너무 고아 잠시 전쟁이 났다는 사실도 잊어 배시시 웃을때즘 가시버시가 말했단다.
애썻다.
고맙다.
다 흘린줄 알았는데 또 나오는 눈물에 뺨이 쓰렸다고 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집으로 찾아갔을 때 할매는 폭격에 박살이 난 집과 누구인지 모를 다 타버린 그을음 속 손가락 뼈 한두개를 보며 그냥 생을 놔버려야 하나 생각했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찾을수도 없는 남편을 그리며 가락지 대신 받은 그 저고리가 그녀에게 유일한 남편이 있었다는 증거.
그녀는 그 자리에 담벼락을 다시 세우고 저고리를 팔아 사람을 사 거적집을 하나 지었다.
하지만 저고리를 팔면서도 저고리 빨끈 끈 하나만큼은 도저히 내놓을 자신이 없어 그부분만 타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 저고리를 바느질 해 동그랗게 말아 손목에 감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이들을 먹이며 그 가난을 헤쳤고 첫째 아들이 돈을 벌어와 살림이 피고 둘째도 직장을 다니며 이래저래 먹고 살만큼 살림살이가 필때 쯤이던가 편지 한통이 왔고 남편이 북한군에게 납치되 월북했으며 그 이후 자신을 찾고있다는 소식을 읽었다고 했다. 남편의 손가락 뼈라고 믿었던 유골은 알고보니 시어머니의 뼈였고 당시 내쳐진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남편이 끌려가자 마자 얼마 안있어 집이 폭격을 당한 모양이였다. 숨을 고르는 할머니에게 자식들은 어서 가보자 했다. 만나자고 했다.
몇십년만에 두근거리며  만난 가시버시는 여전히 예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웃었다고 했다. 웃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그 다 늙은 마음에 다시 불꽃이 일만큼 멋진 웃음이였다고 했다.
그는 북에서 다시 가족을 이뤘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는 만들지 못했다 했다. 의도는 아닌데 진짜 아이가 들어서지도 못했고 들어서도 모두 유산되었다 했다.
할매는 그게 왠지 하늘아래 당신과 나 사이 자식은 이 둘 뿐이라고 제사 때마다 속으로 외쳤던 말이 진짜 이뤄진거 같아 내심 못내 너무 미안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꿈같은 열흘이 지나고 다시 헤어질때 가시버시가 할매 팔목에 두른 빨간 천을 보고 다시 웃으며 말했단다.
내 세상에서 제일 큰 팔목반지를 자네에게 줬구먼.
그걸 여적 가지고 있어 고마웠네.
약조 하나만 하세.
그 끈이 풀리면 나 하늘로 간 줄 알아.
내가 갈때 그 끈 풀어주고 가께.
애썻다.
고맙다.
두 번째의 그 말에 할매는 알았다 하였고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뒤 귀신처럼 그렇게 단단하게 꼬매놔 단한번도 풀린적 없던 저고리 끈이 풀려졌다고 했다.
풀리지 마라 풀리지 마라 매일매일 기도하고 조금이나 헐궈지면 조바심에 다시 바느질을 하며 꽁꽁 도며낸 끈이 어찌된 일인지 자고 일어나니 깨끗하게 풀려있었다 했다. 하지만 할매는 그 끈을 놓지 못했고 매일 매일 그 끈을 보며 그떄 처음으로 웃던 가시버시 얼굴을 떠올리는게 삶의 낙이라 했다.
그러다 며칠전 햇살에 여전히 앉아 그 표정을 즐기던 할매 귓가에 바람결처럼 가시버시가 속삭여줬는데 그 말대로 자기는 해야했다고 했다. 오늘에야 그 끈을 놔주었으니 세상에 이리 편하다며 위안부로 끌려갈 뻔한 자기를 구해준 그 사람 덕에 인생을 그 정도면 곱게 살았다고, 비록 자식 먼저 세상을 떠버려 이렇게 홀로 남았지만 이만하면 되었다며 평온한 얼굴로 그렇게 자기 생을 나에게 조근조곤 이야기하며 쏟아붙고 그날 저녁 돌아가셨다.
아무도 언제 숨이 멈추신건지 모른다 했다. 그저 피곤하니 낮잠 좀 자련다 들어가서 저녁드시라 불렀으나 답이 없어 가보니 곱게 가셨다고 했다. 할머니 옆에 삐뚤어진 글씨로 화장을 당부하는 글과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 내게 고맙다는 글뿐 다른 무엇도 없으셨다 했다. 할매는 나에게 자기를 써넣고 가셨다.
핏줄 하나 연결된바 없던 내가 그녀의 상을 치르며 울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온전히 대한민국을 사는 나의 조상이고 역사이고 핏줄이고 생명력이였다.
그녀는 내 생일에 돌아가셨다…